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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 에세이

사람의 그릇


 한달 보름전에 작은 화분을 구해 마트에서 씨앗을 구입하여 파종하였다. 해바라기와 강낭콩이 그것이다. 오래전부터 화분을 키우는 것에 나름 로망을 갖고 있던 것이여서 많은 준비를 하고 시작했었다. 처음 떡잎이 나오고 이파리가 솔솔 나올때는 그 생명의 신기함에 하루에 몇 번씩 쳐다보곤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금 와서는 뭔가 좀 잘못되어 가고 있는 듯 하다. 줄기만 길다랗게 올라가는 것이 영 멋이 없다. 아마도 햇빛을 보지 못하는 환경에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해바라기야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해가 필요한 식물일진데.. 화분의 위치가 아파트의 배치로 인해 햇볕이 자주 드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하루에 3~4시간 정도 빛을 쪼이면 아파트 다른 동에 그늘이 지는 곳이다. 그래서 콩도 그렇고 해바라기도 저렇게 길다랗게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왼쪽이 강낭콩(사실 강낭콩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이고 오른쪽이 해바라기다>

사람은 자신만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릇의 크기는 있으나 후천적인 노력으로 인해 그릇의 크기는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그릇이라는 것을 정의내려보면,
'그릇은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아무런 조건없이 이해하고 배려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마음의 밀도이다.'


흔히들 자신의 그릇을 키우고 많은 사람들을 담으라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릇을 설명할 때, 극단적으로 이런 표현도 할 수 있다.
"애인이 없는 사람은 자기 마음 속에 단 한사람도 품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았다.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으나 연애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어느정도 동의하는 바이다. 전혀 다른 생활환경과 습관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해야만 이성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을 나 또한 수많은 다툼속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단, 이성간의 문제만이 아니더라도 가족간, 친구간, 사제간에도 그릇의 크기에 따라 인간관계의 편협함의 정도가 결정된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식물을 두려워하는 편협한 마음을 가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저렇게 자라는 것이 저 식물들 탓도 아니고 전적으로 내 탓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의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그냥 두려워만 하고 있다. 소심하고 소심하다. 해바라기와 콩이 내 글을 읽었더라면 평생을 두고 나를 미워하리라. 마음을 열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해야만 그릇의 크기를 넓힐 수 있다. 저들에게 난 어떤 마음을 줄 수 있을까..
고민되고 고민된다.